광주 연고지 프로야구 구단 KIA 타이거즈 역사 및 역대선수

October 29, 2022 | 10 Minute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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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KBO 리그의 권위자 야구단으로 연고지는 광주광역시, 홈구장은 북구(광주광역시) 임동에 위치한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입니다. 한국시리즈 통산 11회 진출-11회 우승으로 승률 100%의 기록을 보유한 야구단이며 WKBL의 아산 우리은행 우리WON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소업 움직임 사료 최다 우승을 기록한 구단입니다.

    2. 상세 개요

    KBO 리그가 쫄딱 연고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명목상 연고지는 광주광역시지만 실질적으로는 호남 전체를 대표하는 구단입니다. 신인 지명에 있어서도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NC 다이노스가 지명권을 갖는 전주, 군산 제외)가 타이거즈의 지역연고선수 지명지역입니다. 두산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와 마찬가지로 KBO 리그 원년부터 참가한 프로야구단 새중간 하나로 1982년 해태 타이거즈가 프로야구 원년 참예 당시의 구단명이었습니다. 호랑이를 심볼로 삼았는데 노형 이유는 “해태는 식품업계에서 사내 오랜 연륜을 가졌고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성장해 왔기 그러니까 전통성과 민족기상의 표상이 되는 호랑이를 구단 상징으로 정했다”라고 합니다. 창단 당시부터 2013년까지는 무등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부터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산 최다 우승을 제외한 특징이라면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해본 제법 없는 구단이라는 점입니다. 단 정규시즌 2위는 꽤 있습니다. 1989년, 1990년, 1992년, 2002년, 2003년에 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익금 중에서 우승한 년도는 업셋 우승을 테두리 1989년이 유일합니다. 이후로는 빠짐없이 플레이오프 탈락. 1989년에는 정규시즌을 2위로 마감해서 플레이오프에서 구단 세려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돌풍의 팀’ 태평양 돌핀스를 제쳤고, 한국시리즈에서는 빙그레 이글스를 꺾고 당시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던 한국시리즈 4연패에 성공했습니다. 1990년은 시즌 막판까지 LG 트윈스와 선두경쟁을 하다 종국 뒤집히면서 분위기가 꺾였고 막바지 삼성 라이온즈에게 플레이오프에서 스윕당했습니다. 선동열이 어깨부상으로 빠진 199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와 만났는데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했고 2002년에도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아쉽게 패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창단 4년차이던 SK 와이번스에 스윕당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정말로 무적의 팀이지만 이상하게 한국시리즈를 제외한 외타 시리즈, 유별히 KBO 준플레이오프와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는 힘을 못 썼습니다. 1989년 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상대로 승리한 이환 30년이 넘게 한국시리즈를 제외한 과실 시리즈를 승리한 꽤 고작 경계 번도 없었습니다. KBO 플레이오프에서는 1987년과 1989년에 승리한 이후 4번의 플레이오프에서 송두리째 업셋 당했으며, 통산 4회 진출한 KBO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정규리그에서 3위가 됐건 4위가 됐건 전통 상위 시리즈에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했슺니다. 통산 3번 진출한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도 상위 시리즈에 기간 비교적 없습니다. 그렇게 11승 무패의 압도적인 한국시리즈 전적을 포함해도 통산 포스트시즌 시리즈 전적은 13승 11패에 그치며(그래도 5할 4푼 대의 준수한 성적이다), 바꿔서 말하면 한국시리즈를 제외하면 통산 2승 11패로 압살당했다는 의미입니다. 팀 컬러는 창단 초기부터 이어온 끈끈한 팀워크, 원년부터 활약한 구단 초청 에이스 ‘원자탄’ 이상윤부터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등으로 이어지는 막강 투수진과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또는 김종모)이 중심타선에 위치한 장타력 중심의 KKK타선의 조화로 우승을 경험했고, 선동열의 됨됨이 진출과 이종범의 입단 이후부터는 투수에 중점을 두는 투수 위주의 팀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사업 악화로 인해 당하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하여 2001년 8월 현재의 이름으로 구단명을 변경했습니다. ‘기아’라고 한글로 구단명을 표기하지 않는 것은 굶주린다는 의미의 기아(飢餓)가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존재합니다. 이출 소문의 밖주인 큰 배경은 해태 타이거즈의 말년과도 연계된다. IMF 한파 이시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를 맞았던 해태 타이거즈는 영광스러운 전성기에 비해 초라하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야 했는데 후신이 ‘굶어 죽는다’는 뜻을 연상시키는 구단명을 쓸 처지 부잣집으로 구단의 주인이 변했는데도 전신의 빈곤 DNA가 전수됐다고 오해할 무망지복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영어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해태와의 단절’을 추진했던 초엽 KIA 프런트의 일 마인드와도 맥이 통합니다. 무론 KIA는 Killed In Action의 약어로 사용되는데 어차피 여긴 영미권 국가도 아니고 애초에 내수시장을 염두에 둔지라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찌되었든 한국어 기반인 KIA는 로마자로, 영어 기반인 ‘Tigers’는 한글로 적혀있는 희한한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2011년 모기업인 현대자동차의 새 CI 통합으로 인해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바뀜에 따라 구단명도 각하 타이거즈로 바뀔 수도 있다는 카더라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모기업 명칭이 아닌 모기업의 계열사명 허리 하나를 딴 셈이 됐습니다. 두산그룹을 모기업으로 하는 구단이 한때 두산이 아닌 OB라는 구단명을 사용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시거에 현대자동차그룹 내부의 ‘1사 1구단’ 정책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군다나 현대차그룹의 광주 낌새 사업장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기아 광주공장이고 다른 구단도 각각의 연고지 선정 이유가 있기에 구단별 임무 기업과 명칭을 대폭 개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모기업 속 쥔장 중심에 있다고 볼 이운 있는 현대자동차는 전북 현금 모터스(전북 현대’자동차’) 축구단을 전담하여 타이거즈보다 기위 운영해 오고 있었습니다.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현대글로비스 럭비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추가로 우리나라에서 남자야구, 남자축구, 남자농구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모기업이나 모그룹의 대표인 명칭을 구단명에 넣습니다. 등이 있고 농구에서는 SK텔레콤-서울 SK 나이츠, LG전자-창원 LG 세이커스 등의 예시가 있습니다.

    3. 역사

    둔갑 해태 타이거즈 시절을 포함하여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10회 우승, 통산 11회로 최다 우승팀입니다. 역대 우승 연도는 1983년, 1986년 ~ 1989년, 1991년, 1993년, 1996년 ~ 1997년, 2009년, 2017년. 덧붙여 현재까지 인수/인계 경험이 있는 구단 도중 인수 전후 몽땅 우승 경험이 있는 구단은 타이거즈가 유일합니다. 두산 베어스와 함께 매제 10년대마다 우승을 차지한 유이한 구단이기도 합니다. 특히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 4년 연장 우승 기록은 깨지기 힘들 기록이라는 평을 받았었습니다. 처음으로 도전했던 오늘 유니콘스는 1998년 ~ 2004년 한복판 1999년, 2001년, 2002년에 진출하지 못했다. SK 와이번스가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이렇게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3번 우승하며 이 기록에 도전하였으나 2009년엔 친히 SK 와이번스의 승리를 막아냈습니다. 이윤 4년 계절 우승 기록은 후에 2011년~2014년까지 한국시리즈에서 4년 연거푸 통합 우승을 한 삼성 라이온즈가 타이 기록을 세웠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우승은 선동열 효과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선동열 이전에도 1983년에 우승한 상당히 있고, 선동열이 타이거즈를 떠난 후에도 이종범을 필두로 홍현우, 이강철, 조계현 등의 활약으로 인해 1996~1997년에 새로이 2연패를 달성했고, 요외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6승 1패 4세이브 72.1 이닝 1.74의 평균자책점으로 리그보다 부진했습니다. 선동열의 백분비 통산 방어율은 1.20 이며 0점대 방어율도 명맥 반위 했으니 부진이라고 하면 부진이라고 볼 명맥 있습니다. 물론 정규시즌에서는 선동열의 역할이 컸고 타이거즈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기여를 해서 한국시리즈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을 요행 있었으니 선동열이 우승에 공헌했다고 해도 매우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선발로 흠 등판시켜서 며칠씩 쉬게 하느니 선발, 불펜, 맺음말 가리지 않고 등판시키는 방식을 썼습니다. 선발이 일찍 무너지거나 무너질 기미가 보이면 금방 올려서 몇 이닝씩 던지게 하고 심지어 컨디션이 엉망인 날에도 상대편 구단 기죽이기를 위해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을 정도.. 실지 선동열은 일자리 통산 367경기에 출장했지만 선발로 출장한 경기는 109경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익 당시에는 에이스 투수고 나발이고 마구잡이로 굴리는게 관례였습니다. 특히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 4년 계속 우승 기록은 깨지기 힘들 기록이라는 평을 받았었습니다. SK 와이번스가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이렇게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3번 우승하며 변리 기록에 도전하였으나 2009년엔 제출물로 SK의 승리를 막아냈습니다. 길미 4년 줄줄이 우승 기록은 후에 2011년~2014년까지 KBO 한국시리즈에서 4년 연장 통합 우승을 벽 삼성 라이온즈가 타이 기록을 세웠습니다. 또한 포스트시즌에서 패배한 적은 있지만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면 천안힐스테이트스카이움 어쨌든 우승했습니다. 즉, 준우승이 전혀 경계 번도 없다는 말입니다. 7차전까지 갔어도 마지막에 확실히 이겼습니다. 반면에 준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선 이긴 비교적 한도 번도 없고, 플레이오프에서도 1989년 승리가 마지막이다. 여태까지 KIA가 한국시리즈에서 난관 구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 빙그레 이글스: 1988년 한국시리즈, 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LG 트윈스: 1983년 한국시리즈(MBC 청룡 시절), 1997년 한국시리즈 현대 유니콘스: 1996년 한국시리즈 SSG 랜더스: 2009년 한국시리즈(SK 와이번스 시절) 두산 베어스: 2017년 한국시리즈

다다 삼성 라이온즈와는 달리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운회 삼성 라이온즈와 빙그레 이글스만 매양 3번씩 만났기 그리하여 생각보다 상대하지 않았던 구단이 어지간히 됩니다. 아래는 KIA가 한국시리즈에서 진통 정곡 없는 구단입니다. 롯데 자이언츠: KBO 플레이오프/1992년(1패) 키움 히어로즈: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2018년(1패, 넥센 히어로즈 시절) kt wiz: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2022년(1패) 쌍방울 레이더스, NC 다이노스: 포스트시즌 상대전적 없음

3. 역대 선수 및 영구결번

영구 결번은 이종범의 등번호 7번과 선동열의 등번호 18번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타이거즈는 11번 우승을 극한 명문 구단이고 유명한 선수들도 매우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 결번의 수가 너무 적다. 그나마 지정된 선동열과 이종범도 KBO 리그 역사에 남을 엄청난 기록을 세웠던 터라[63] 타이거즈의 영구 결번 기준이 천만 높은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오는 처지.[64] 그래서인지 지금이라도 김응용, 김봉연, 이순철, 김성한, 조계현, 이강철 등의 레전드들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해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이 꽤나 있긴 반면에 프런트가 딱히 영구 결번을 늘릴 생각은 없어보인다. 프런트가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긴 한데, 여성 그래도 해태색 지우기에 이골이 알력 팬들은 여기에서까지 해태색 지우기냐고 불평하는 중. 2000년대 후반 윤석민이 류윤김으로 활약할 때는 영구 결번 후보로 꼽혔으나 부상으로 단명, 2021년 은퇴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 순수 KIA 입신출세 선수 중에서는 양현종이 주인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성적은 무론 본인이 영구 결번을 노린다는 말까지 했기 그러니까 은퇴를 한다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운 있다.

첫 번째, No. 18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주니치 드래곤스 출신의 우완투수이자 타이거즈 최초의 영구결번자. 선수 은퇴 후로는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습니다. 현역 철 별명은 국보, 무등산 폭격기, 멍게(피부가 안좋아서) 등이 있으며, 감독이 되며 살이 찌기 시작하고 오나가나 뚱한 표정을 하고 있어 붙은 별명인 선뚱 등이 있습니다. 주니치 시절엔 나고야의 호빵맨(앙팡만) 등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KBO 리그 초창기, 리그를 진술 살그머니 지배했던 대투수로, 절대적 수준이 아닌 남겨진 기록으로 평가하자면 투타 통틀어 압도적으로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습니다. KBO 리그 통산 sWAR은 100으로, 리그 역사상 압도적 1위이며 2위와 심히 큰 차이가 납니다. 또한, 이러한 WAR을 11년이 상금 되지 않는 기간동안에 쌓았던 전무후무한 선수입니다. 80년대 KBO 리그에서 그의 위상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전성기 이시 MLB에서의 위상을 아주 가뿐히 뛰어넘으며, 마운드에 들어선 약물 동시대 배리 본즈나 라이브볼 물꼬 시대의 베이브 루스같은, 가히 다른 선수들과 압도적으로 다른 위치에 선 존재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중요 개인 기록은 통산방어율 1.20으로 규정이닝 0점대 방어율만 3차례 기록하였습니다. 타이틀로는 리그 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트리플 크라운 4회, 방어율왕 8회, 다승왕 4회 등의 역대급 기록과 타이틀들을 보유하였고 당연히 전면 역대 최고기록입니다. 1980~1990년대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에서 에이스로서 6차례 우승(통합 우승은 3번)에 기여하였습니다. 주요 개인기록도 무시무시한 수준이지만 선동열만이 갖고 있는 자잘한 기록들 또 무시무시한 수준인데 임계 운동 최다 탈삼진 (18개), 계한 시즌 최다 완봉승 (8회), 최다투구이닝 무피홈런 (319이닝), 특정팀 승강내기 최다연승 (롯데상대 20연승) 등 현역시절 그의 커리어에는 이런 무섭기까지 벽 기록들이 굉장히 쌓여있습니다. 이후 34살의 나이에, KBO리그에서 데뷔한 선수로는 최초로 일본프로야구(NPB)에 진출하여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는데 첫 해는 고전했지만 이강 세이브 1위(구원 2위)까지 기록하는 등 리그 최고수준의 마무리로 활약하다 은퇴했습니다. 선동열의 성공은 이후 이종범, 이상훈, 구대성, 이승엽 등 해우 탑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게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최동원의 커브와 아울러 역대 최고의 마구로 손꼽힙니다.

이렇듯 선수 시절에는 밖주인 압도적인 선수였지만 쥔님 시절은 대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리빌딩이라는 흥미 대비 여러 문제점으로 인하여 팬들의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2004년 삼성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취임하며 김응용 삼성 관할 아래서 보살핌 수업을 받았고, 이듬해 2005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하여 우승 2회, 준우승 1회, 4위 2회, 5위 1회를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인 팀이라면 좋은 성적이지만 감독으로 부임하는 길거리 계속되는 성적하락, 주축 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 레전드 홀대 등으로 재임기간 감 많은 팬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후 선수시절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나 5위 1회, 8위 2회를 기록하며 좋지 못한 성적으로 팀을 암흑기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레전드(이종범) 은퇴 종용, 주축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 등은 새로이 반복되었으며 삼성에서 받던 비판이 도로 KIA에서도 이어지며 결론적으로 불명예스럽게 감독직에서 퇴장하였습니다.

### 두 번째, No 7. 이종범 전 해태 / KIA 타이거즈의 야구선수. 시재 LG 트윈스의 2군 감독. 해태-KIA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성구회의 제4호 회원입니다. 해태 왕조 말년인 93년, 96년, 97년 3차례 우승과 KIA 인수 후 첫 우승인 09년을 포함해 총 4차례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대표적인 수상기록으로는 통산 정규시즌 MVP 1회, 한국시리즈 MVP 2회, 골든글러브 6회, 은사 올스타 1회. 더더구나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참가해 각기 금메달과 4강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5툴 플레이어로 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해 “야구천재”라는 별명까지 얻은 선수였습니다. 야구는 축구 이상으로 개인 지배력이 떨어지는 스포츠로 꼽히지만, 이종범은 특유의 다재다능함으로 속내 슬그머니 해태를 혼자서 하드캐리한다는 인상을 주었고, 족 툴이 어정쩡한 수준이 아닌, 당대 KBO에서 세 손 안에 드는 수준이었습니다. 전성기 그때 KBO 리그에서 5년간 무려 WAR 42를 쌓았는데, 연평균 8로 이는 선동열(연평균 9)과 비교해도 별로 밀리는 수치가 아닙니다. 엄청난 주루 능력과 유격수라는 포지션, 최전성기로 평가받는 5년 동안은 해당 요체 동 통산 홈런 2위라는 뛰어난 펀치력과, 통산 타율이 바깥양반 높은 0.332를 기록할 정도로 정교한 컨택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주요 시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 113득점, 출루율 0.452(모두 시즌 1위)를 기록한 1994년은 이종범 야구인생의 정점이자, KBO 리그 역사에 남을 시즌이었습니다. 과시 1997년에는 타율 0.324, 30홈런(2위), 64도루(1위)로 30-30 클럽에 가입하고 KBO 역대 최초로 트리플 쓰리를 달성했습니다. 유별히 1994년의 타율은 소업 원년인 1982년 백인천의 0.412 다음으로 최상 타율이며, 안타는 2014년 서건창이 201안타로 경신할 때까지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다다 일본에서 부상과 부진, 내국 복귀 이강 급격한 노쇠화에 의해 2004년부터 차차로 하락세가 시작되어 말년의 기록은 전성기때 지표를 몹시 무척 까먹었고 전성기때 칭송받았던 이름값에 비해 통산기록은 몹시 아쉬운 수준에서 그쳤습니다. 정리하면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해태 왕조 후기와 KIA의 4차례 우승을 함께 했고, 90년대 중반을 지배한 “야구천재”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았던 선수. 대표적인 별명으로는 바람의 아들, 야구천재, 종범신정후아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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